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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14. <부정공>통정대부부호군공휘영진묘갈명(通政大夫副護軍公諱永振墓碣銘)
1. 문헌 목록 〉19. 19世 〉16. <부정공>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공휘영권묘갈명(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公諱永權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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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부정공>학생공휘영보가장(學生公諱永寶家狀)
學生公諱永寶家狀 府君諱永寶初諱永澤字汝玉姓趙氏貫玉川始著于高麗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其下屢世爲國棟樑之忠勳懿蹟爲世師表而道學節義具載于曾王考淸齋府君狀文之中不爲歷叙諱智崑井邑縣監循良之蹟載輿地誌友于之義著相好亭諱大承泰仁縣監民歌善政立石頌德龍蛇之難勤勞於 王與白休庵仁傑金甑山鸞祥爲道義之交諱義吉通德郞 仁廟丙子糾儀施至礪山聞和成痛哭而歸謝絶榮塗七世以上也曰光耘曰重命曰廷仁高曾祖諱也考諱河祥號淸齋隱居行義妣順興安氏文成公裕后孝謹女婦德甚備宗族稱其賢媛也 純祖丁亥十二月十五日擧府君四昆季中第三也性度寬嚴志氣豪邁敏於事謹於行德以感人威以服人日用行事不爲一毫飾僞不求人知在幼年不與群兒戱從長者遊鄙俚之語惰慢之氣不設於口體善聞古今人之賢行也及其就傳之年受學于從叔聾世翁府君不厭于學漸解義趣自知用力翁亦不倦于敎益加激勵將期昌大之望矣家貧親老恐或旨養之有闕勤於耕織未克專攻聾世翁歎惜其大器未成也析箸時取其田地器物之荒頹者曰逸何爲哉勤若此中可使爲饒也不撤功力竟成一家矣外內艱不懈不怠盡哀盡禮日省于墓不以寒署廢每當夫日前期而齋粢盛必親檢而務豊潔致其如在之誠如新之痛兒兄弟四人同處一室相爲規戒曰瞻彼先亭相好之情油然而生其在他人猶爲敬慕况吾四昆季膺相好先祖之餘陰也豈可忘先德墜先業哉益篤友愛雖忙勞中晨夕必輪誦斯干詩也丁卯冬奄遭伯嫂氏喪喪祭遵禮悶歎家祚之劣薄曰宗事誰奉子女誰養勸伯氏之再聘擧古今人之惑後妻而虐子女嚴而拒之也不敢强勸與仲兄氏通政公協議攝奉祖廟奉保伯兄氏撫育衆男妹待其冠筓使家姪奉先廟治舊産時加警誨也壬午秋里有殺獄之變居人驚怯將欲奔散府君與袒免弟永珪協謀曰先安民心次決獄事可也曉喩而安頓矣本倅及客官再三采檢原法而寬嚴裁決官隸少不致侵掠里人一不受濫刑數月之間無訟而止鄕隣咸稱吾府君處事之察機敏活也門戶零替先山守護之策先墓享祀之需未遑備置常切痛悶告于仲兄氏通政公議于諸宗族各出誠穀積歲拮据置祭田及墓田又備用衛墓道購書籍而資兒孫輩之學業門戶漸昌此是奉先牖後之嘉範也豈不爲賢乎哉世怯愴桑倫綱頹墜里俗紊亂也與宗憲秉斗氏謹倣呂氏藍田之鄕約曉喩之褒戒之賴而漸化乃爲名庄之龜山即今吾家之梓鄕也孰不指點而稱頌哉地逐名賢好正爲實際語也 高宗壬辰秋偶爲靡寧行禱劑藥未獲神明格佑竟以天年考終于甲午正月七日壽六十八鄕里莫不嗟歎曰賢人死也會葬者數百人矣墓屢遷而今在飛龍山南麓印岩石上乾坐原配光山金氏道源女文肅公周鼎后乙丑六月七日生女德甚茂孝奉舅姑承君子晨汲井書勤圃敬於諸嫂叔和於衆娣姒菀然有古女士之行也癸卯四月二日卒享年七十五墓大光山上局堂谷枕辛原育二男一女尙根文根演根號槐軒孝友篤摯文學精博爲士林之宗匠吾姓之賢俊也女適光山金相冕孫沇鉉勝鉉長房出次房無育喆鉉三房出曾孫淵淸淵晦昌寧曺秉箕沇鉉二男一女淵宰淵世淵夏晋州姜基善淸風金壽永洪州洪冠植勝鉉三男三女淵培淵眞喆鉉二男玄孫休穆休材休官休邦桂正桂煥淵淸六男休坤桂珍桂度淵晦三男桂邦桂昊桂弘淵宰三男桂忠桂天天淵世二男桂民淵夏一男不盡錄嗚呼府君好古好禮誠實事業世無與儔也孝且友天倫親勤且儉家道成喪祭盡禮追遠之誠也耕讀傳業遺安之計也保宗宜家承先牖後繼述之功也遇事坦然不畏威勢立心晏如不勤貧富容物有量聲望益重御衆以德鄕俗丕化吁其盛矣乎以若蘊抱未能顯達終爲隱淪是亦命也歟痛恨罔極也不肖之生未滿三朞奄忽見背僅爲承顔今距七十有餘年也不肖雖爲愚昧今無所述則不知不明之罪難可爲逃故謹考季父槐軒翁過庭睹聞之所記又參父兄及鄕父老常時稱頌之所傳玆敢纂次不識體裁反恐罪皇萬功伏惟好懿君子秉筆而立言俾作百世徵信之資千萬北冀懇之至 不肖孫 沇鉉 謹識 학생공휘영보가장(學生公諱永寶家狀) 부군의 휘는 영보요 초휘는 영택(永澤)이며 자는 여옥(汝玉)이고, 옥천조씨인데 고려검교 대장군 휘 장(璋)에서 비로서 현달하여 그 아래 여러 대가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충성한 훈업과 아름다운 행적은 세상의 사표가 되었고, 도학 절의는 증조부 청재부군의 장문중에 갖추어 실렸으므로 첩록 아니한다. 휘 지곤(智崑)은 정읍현감으로 착하고 어진 치적이 『동국여지승람』에 실렸고 우애한 뜻이 상호정에 밝혔으며, 휘 대승(大承)은 태인현감으로 백성이 선정을 노래하고 비석을 세워 덕을 사모 하였으며, 임진년과 계사년 왜란에 근왕하였고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증산(甑山) 김난상(金鸞祥)과 더불어 도의로 사귀었으며 휘 의길(義吉)은 통덕랑으로 인조때 병자호란에 의병을 모집하여 여산에 진군하다가 화친이 성립됨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 벼슬을 사절하였으니 七세 이상 이다. 광운(光耘) 중명(重命) 정인(廷仁)은 고조·증조·조의 휘 이다. 고의 휘는 하상(河祥)이요 호는 청제(清齋)로 숨어 살며 의리를 행하였고, 비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 효근(孝謹)의 딸로 부덕이 있어 종족이 현부인이라 칭하였다. 순조 정해(丁亥) (一八二七)년 十二월 十五일에 부군을 四형제중 三남으로 출생하였는데,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엄하며 뜻과 기질이 호탕하고, 뛰어나 일에 민첩하고 행실을 삼가서 덕으로 사람을 굴복하며, 일용 행사에 털끝만큼의 가식이 없었으며 사람이 알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장난을 하지 아니하고 어른과 함께놀며, 더러운 상말과 게으른 기식을 입과 몸에 대지 아니하고, 고금 사람의 어진 행실을 잘 들었다. 글 배울 나이가 되자 종숙 농세옹(聾世翁) 부군에게 수학하며, 부지런히 배우기를 힘써 점차 뜻을 해득하고 힘쓸곳을 알았으며, 옹이 또한 설실이 가르치니 장차 크게 진취할 가망이 있었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어 지체 봉양이 혹 모자랄까 염려하여 농사를 힘쓰고 학문 전공을 못하니 농세옹이 그 대기미성(大器未成)함을 탄식 하였다. 그 재산을 나눌때 그 좋지 않은 땅과 기물을 자신이 차지하며, 말하기를 『부지런히 하면 이것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다』 하고, 근검 절약하여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다. 외내 상사에 성실이 슬픔과 예를 다하여 차고 더운 것 관계없이, 날마다 성묘하고 제사날을 당하면 전기하여 재계하며 제물은 반드시 친히 점검하여 계신 것 같은 정성과 새로운것 같은 슬픔을 다 하였다. 형제 四인이 한방에 함께 거처하며, 서로 경계하되 『저 상호정을 보면 상호의 정이 왕성하여 그 타인도 오히려 공경하고 사모하거늘 하물며, 우리 四형제는 상호 선조의 여음을 받은자라 어찌 선덕과 선조의 음덕을 망각하리오』 하고는 더욱 독실이 우애하여 아무리 바쁜 때라 하더라도 밤과 새벽에 반드시 사간시(斯干詩)를, 돌여 외웠다. 정묘(丁卯)(一九二七)년 겨울에 백수씨 상사를 만나 예를 따라 장제하고 가운의 비박을 한탄하되 『종사를 누가 받들며 자녀를 누가 양육할까?』 하고는 백씨의 재취를, 권하니 고금 사람의 후처에 혹하며 자녀를, 학대한 일을 들어 엄히 거절 하는지라 감히 다시 권하지 못하고 중씨 통정공과 협의하여, 사당을 대리 건봉하고 백씨와 그 자녀를 양육하며 그 성혼을 기다려 큰 조카로 하여금 사당을 받들게 하고 때로 경계를, 더하였다. 임오년 가을에 살옥(殺獄)의 변이 마을에 일어나니 마을 사람이 놀라서 장차, 분산코저 함에 부군이 종제 영규(永珪)로 더불어 협의하되, 먼저 민심을 편안히 한 다음에 옥사를 해결하자 하고, 효유하니 민심이 안돈하였다. 본군 성주가 재삼 법에 따라 검찰하여 관엄하게 재결하니 관속이 침략치 못하므로 마을 사람이 한 사람도 함부로 형벌을 받지 아니하고 두어 달 사이에 송사가 원한없이 완결되니 향린이 다 우리 부군 처사가 기민함을 칭찬하였다. 집안이 빈한하여 선산 수호할 계책과 향사할 근본을 갖출 겨를이, 없어 항상 통탄하다가 중씨 통정공께 고하고 여러 종족과 의논하여 각기 정성어린 곡식을 출자하여 여러해 식리한 뒤에 제위토를 장만하고, 또 석물을 갖추어 묘도를 호위하고 책을 사서 아손의 학업을 권장하니, 문호가 점차 찬성하였다. 자주 상해의 변에 놀라 윤강이 퇘패하고 세속이문한하므로, 종당 병두(秉斗)씨와 함께 여씨의 향약을 본받아 엄히 조약을 세우고 효유하여 포계하니 이로부터 점차 순화하여 이에 이름난터 구산이, 이름난 곳이 되어 이제 우리집 선향이니, 누구 아니 가르치며 칭송 아니할까 보냐. 고종 임진(壬辰)(一八九二)년 가을에 우연히 병을 얻어 기도하고 복약하여도 신효를 얻지 못하고 마침내 갑오(甲午)(一八九四)년一월七일에 향년 六十八세로 고종하니, 향리에서 한탄아니한 자 없이 어진 사람이 죽었다. 하고 장례에 모인 자 수백인 이었다. 묘소는 자주 옮겨 이제 비룡산 남록인 암석상건좌원(飛龍山)(南麗)(印岩石上乾坐原)에 있고 부인은 광산(光山) 김씨(金氏) 문숙공주정후도원(文肅公周鼎后道源)의 딸로 을축(乙丑)(一九二五)년 六월 七일에 출생 하였는데 받들고 군자에게 순응하며, 물긷고 낮에는 채소를 부지런히 가꾸어 모든 수숙을 공경하고, 여러 동서와 화락하여 옛 여사의 품위가, 있었다. 계묘(癸卯)(一九六三)년 四월 二일에 향년 七十五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대광산상국당곡침신원(大光山上局堂谷枕辛原)이다. 아들은 상근(尙根) 문군(文根) 연근(演根)인데, 연근의 호는 괴헌(槐軒)인데, 효우 독지하고 문학이 정박하여 사림의 종장이요 오종의 현준이었으며 딸은 광산(光山) 김상면(金相冕)부인이고, 손자 연현(沇鉉) 승현(勝鉉)은 큰아들 소생이요, 차방은 아들이 없으며 철현(喆鉉)은 셋째아들 소생 이었다. 증손 연청(淵清) 연회(淵晦) 창녕(昌寧) 조병기(曺秉箕)부인은 연현 소생이요. 연재(淵宰) 연세(淵世) 연하(淵夏) 진주(晋州) 강기선(姜基善) 청풍(清風) 김수영(金壽永) 홍주(洪州) 홍관식(洪冠植)부인은 승현 출생이며, 연배(淵培) 연진(淵眞)은 철현 소생이다. 현손 휴목(休穆) 휴재(休材) 휴관(休官) 휴방(休邦) 계정(桂正) 계환(桂煥)은 연청 소생이요. 휴곤(休坤) 계진(桂珍) 계도(桂度)는 연회 소생이며, 계방(桂邦) 계호(桂昊) 계홍(桂弘)은 연재 소생이고, 계충(桂忠) 계천(桂天)은 연세 소생이요. 계민(桂民)은 연하 소생이며, 이하는 다 기록 아니한다. 아, 부군이 고례를 좋아한 성실한 사업은 세상에 더불어 짝할자 없으며, 효도하고 우애하여 천륜을 친하고 부지런하며, 검박하여 가도를 이루었고 초상 제사에 이를 다한 것은 멀리 추모한 지정이요. 농업과 학업으로 전가한것은 편안할 바를 끼친 계책이며, 종가를 보호하고 집안을 편안히 하며, 선업을 이어 후손을 깨우친 것은 계술의 공 이었다. 일을 만나 마음이 평정하여, 권세를 두려워 아니하고 마음을 침착하고 편안히 하여 빈부에 마을을 쓰지 않고 물건을 용남할 기량이 있어 성망이 더욱 무겁고 여러 사람을 덕으로 거느려, 고을 풍속이 크게 감화하니 감탄하고 성대 하도다. 쌓인 포부로서 능히 현달치 못하고 마침내 침체 되었으니 이 또한 운명인가, 슬프고 한스러움을 다 말할 수 없다. 불초가 三세가 못되어 문득 세상을 버렸으므로, 겨우 얼굴을 뵙고 이제 七十이 넘었다. 불초가 비록 우매하나, 이제 기술치 아니하면 알지 못하고 밝히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므로 삼가 계부 괴헌옹의 뜰을 지나며 듣고 본 바를 기록한 것과 또 집안 부형 및 향당 부로가 칭송하여 전한 바를 참고하여 이에 감히 차서대로 편찬하니, 체재를 알지 못하여 도리어 욕이 될까 죄송하기 그지없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이 덕을 좋아하는 순자는 붓을 잡고 말을 바로 세워 하여금 증신할, 자료를 만들어 주기를 천만 기원 합니다. 불초손(不肖孫) 연현(沇鉉)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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